2009. 10. 21 (수)
터키를 떠나는 날이다. 무엇보다도 이곳 이스탄불을 벗어나는 것이 큰 일이다. 가지고 있는 지도라고는 이스탄불 중심부를 소개하고 있는 여행지도들 뿐. 그나마 다행이라면 터키 국제공항이 이스탄불 중심가에서 서쪽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한 가지... ‘그래, 여기서부터 공항 쪽으로 가다보면 서쪽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라는 무작정 정신이 발동한다. 아침에 숙소 빅애플 현관에서 득과 내일 다시 그리스 테살로니키(득은 오늘 밤 이곳에서 그리스 테살로니키행 야간열차를 타서 내일 오전에 그곳에 도착할 예정이다)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술탄아흐멧을 나와 입살라(터키)-키피(그리스) 국경으로 가고자 아타튀르크 공항 방면으로 나가는 도로 위에 올라섰다. 득, 꼭 열차에서 예쁜 아가씨와 멋진 데이트 해라!
한 가지 고백...
엊그제 빅애플 로비에서 책꽂이를 발견했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론리플래닛 ‘그리스판’. 이 책꽂이에 있는 책들의 정체가 여행가들 사이에서 흔히 있는 ‘필요하면 가져가세요’ 식의 give & take 책인지, 아니면 빅애플 소유의 책인지 알쏭달쏭하다. 참 낯짝도 두꺼워졌다. 아니 이제는 천연덕스런 양상군자라 불리는 편이 더 나을 듯 싶다. 그래, 비록 영어책이었지만 없는 것보다 백 배 낫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내 ‘손’은 어느 새 그 책을 탱크백 안으로 우겨넣고 있었다. 처음부터 내 책이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쯧쯧, 난 나쁜 놈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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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터키는 정치/경제적으로 큰 당면과제인 EU 가입을 앞두고 있다는 뉴스를 접해본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동부 국경에서 이곳 서부 끝까지 대부분의 중요국도 일부구간에서 도로확장 및 포장공사에 한창이다. 이스탄불에서 입살라까지의 주요국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잘 달리다가도 군데군데 도로공사로 뒤죽박죽, 가끔씩 이정표를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터키의 이정표가 몇몇 ‘스탄국가’ 처럼 그렇게 허섭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지만... 아무튼, 가다 서서 물어보고 다시 또 가다 서서 물어보기를 몇 차례 한 끝에 드디어 터키의 서쪽 끝 입살라 국경에 도착했다. 저 멀리 거대한 터키 국기가 펄럭인다.
국경도착. 벌써 여섯 번이나 경험했음에도 언제나 국경통과는 신선한 긴장을 불러온다. 두근두근. 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싶었는데 이게 왠일이란 말인가!? 터키쪽 국경에서 내 여권을 보고 도장 하나 찍어주더니 통과란다. 아니, 입국 때도 그렇더니만 출국 때도 마찬가지로 그 흔하디 흔한 짐 검사 한 번 없이 도장 ‘꽝!’, 끝. 너무 싱겁다. 터키에서부터는 여행이 어렵지 않을 거라던 시비르스키익스트림(www.sibirskyextreme.com) 멤버들, 그리고 스티브, 세마 등의 조언이 사실임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다.
좋지 않은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 입살라와 키피의 한 가운데에서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는 철교의 양 끝편으로 두 나라의 병사들이 무장을 한 채 오가는 차량들을 바라본다. 마치 우리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는 느낌 그것이다. 그렇다고 일일이 세워서 검문을 하는 것은 아니다보니 ‘섬나라’ 남한과 ‘은둔왕조’ 북한과의 관계보다는 백배 낫다. 더군다나 양측 병사들 모두가 모터사이클 여행자들을 자주 봐 왔다는 것처럼 심드렁하니 나를 바라본다. “김빠지는군. 허허.”
그리스 쪽 국경. 이건 지금까지 봐 왔던 국경개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국경이다. 분위기가 마치 시외버스 정류소에 있는 “i” (인포메이션센터)와 꼭 같다. 부스에 다가가서 여권 내밀고 도장만 찍으면 끝이다. 터키도 내게 충격이었는데, 여기 그리스는 충격을 넘어서 아예 황당함이다. 뭐 이렇게 쉽게 넘을 수 있지? 하지만, 그 부스에 다가가서 내 여권을 내밀자 이내 “Do you have a Green Card?”라고 물어온다. 아차, 여기서도 차량등록증이나 까르네보다 자동차보험(그린카드) 유무가 더 문제가 된다. 있을리 없다. 그린카드가 없다고 하니 잠시 기다리라면서 현장에서 발급받을 수 있도록 사무실로 나를 데리고 간다.
EU국가에서 한 달 사용할 수 있는 그린카드를 발급해 줄 수 있다면서 100유로 라고 한다. 백 유로? 그 돈이 내 수중에 있을리가 없지. 카드결제가 가능하냐고 물어보니 저기 국경검문소(부스) 옆에 있는 면세점-터키/그리스간 국경검문소 각각에 우리나라의 할인마트처럼 생긴 면세점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단, 공항 면세점처럼 화려한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에서 ATM 인출이 가능하다고 알려준다. 어차피 여기서부터 프랑스 칼레까지는 ‘유로존’이니 며칠간 사용할 약간의 활동자금을 함께 인출했다. 그린카드 구입을 마지막으로 그리스 입국은 끝.
터키에 입국하기 한 달 전 쯤, 주터키 한국대사관에 이 메일을 보낸 것이 생각난다. 75$하는 3개월짜리 그린카드를 독일의 한 바이크여행 관련 회사(www.knopftours.com)에서 판매하고 있는데, 보험등록 및 발급에 약 한 달이 걸리니까 그것을 대사관(혹은 영사관)에서 대신 받아줄 수 있는지 물어보는 내용이었다. 대사관의 이메일은 보낸 지 나흘만에 ‘읽음’으로 나오는데도 여전히 묵묵부답.
아무튼 이것으로 끝. 터키-그리스간 국경통과에 총 소요시간이 채 한 시간도 안 걸렸다. 그리스로 넘어오자마자 제한속도 130km/h의 잘 닦인 고속도로가 내 앞에 펼쳐져 있다. 우와, 고속도로에서 모터사이클 주행이 가능하다니! 부러움에 또 부러울 따름이다. 가급적 빨리 테살로니키 근처까지 가야 내일 오전중으로 득과 다시 만나는 데 수월하다는 생각이 앞서자, 알게모르게 스로틀을 좀더 세게 당긴다. 고속도로, 달리기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길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주변의 자연, 공간들과 분리되어 놓여있다는 느낌이다. 빠르기는 빠르되, 옆이 아닌 오직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 나는 어느새 그레이하운드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도로 너머로 비쳐지는 이곳 그리스의 풍경은 에게해를 함께 마주하고 있는 터키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정제되지 않은 자연미를 선사하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간중간에 1,000cc가 넘는 대배기량 바이크들이 나를 앞질러 나아간다. 이뚜까 9호 옆을 스쳐지나 가면서 백밀러로 나를 바라보며 어깨 너머로 손인사를 건넨다. 나 역시 왼손을 들어 답한다. 130~40km/h의 속도로 달려서인지, 평소와 달리 주유 후 285km정도밖에 달리지 않았음에도 주유경고등이 켜졌다. 역시 속도 내면 기름 많이 먹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부터는, 아니 터키에서부터는 멀지 않은 곳곳에 주유소가 위치해 있기에 주유경고등이 들어오건 말건 마음은 태평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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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시. 다소 쌀쌀하다. 기름을 넣기 위해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동네길로 방향을 돌렸다. 이정표는 테살로니키를150km, 카발라 15km라고 가리키고 있다. “카발라?” 빅애플을 출발하기 전, 오늘 달릴 길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할 때 얼핏 본 기억이 난다. 카발라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가다 주유소에 들러 이뚜까 9호의 기름통을 채웠다. 리터당 1.2유로가 넘는다. 누군가 그랬다던데, 모터사이클 여행은 길바닥에 돈을 뿌리고 다니는 여행이라고. 절대로 공감한다.
다섯시 반. 해가 뉘엇뉘엇 저물어 간다. 주유 후 약 5km 정도 더 달리니 카발라 시내에 들어설 수 있었다. 카발라 시내 한 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는 도시명물인 오래된 벽(옛 수로로 쓰인 다리 같기도 하고)을 중심으로 유럽의 골목길을 이리 저리 헤매면서 ‘슬쩍한’ 그리스편 론리플래닛에 나온 숙소를 찾아다녔다.
숙소 도착. 어제의 빅애플에 비하면 잠자리는 백배 낫다. 하지만 아침식사가 없는데다가 가장 저렴하다는 숙소임에도 ‘유럽’이라서 그런지 은근히 비싸다. 저녁 일곱시, 샤워를 마치고서 예의 그 벽이 있는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을 서성이며 두리번거리면 출출한 배를 채울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다. 골목길을 내려가다가 마침 불이 켜져 있는 핸드폰 가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윈드(WIND)’라는 통신사의 심카드를 구입해서 무사히 그리스로 넘어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세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GSM 방식의 핸드폰 덕을 톡톡히 본다. 이내 세마에게서 조심하게 운전하라는 문자가 도착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로밍해 온 득의 핸드폰과 동생에게도 문자를 날렸다. 내일 득에게 문자가 도착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동네를 거닐다가 작은 가게에 들러 맥주와 샌드위치, 그리고 꼬치구이로 저녁을 해결하는데 옆에 앉은 아저씨가 꼬치구이와 잔 술을 주문하더니 한 모금 쭈욱 들이킨다. 무슨 술일까 궁금하다. 넉살좋은 주인아주머니께 같은 걸로 나도 한 잔 달라고 주문해 본다. 그리고 들이키는데... 읔, 터키에 ‘라키’가 있었다면 그리스에는 ‘오지’가 있었다. 40%의 독주를 넘긴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 벅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