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gJoon Lee 2009. 9. 7. 15:00

2009. 7. 30 (목)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재니(은행에 다니는, 동생 뚜까의 베.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니야, 오빠야. 응? 아니, 잘 지내지 못해. 지갑하고 카드를 잃어버렸거든.” 부끄럽지만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다는 사실을 재니에게 이실직고한 다음 카드사용 정지와 사용내역 확인을 부탁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호텔 체크인을 한 것 이외에는 신용카드 사용내역이 없다고 재니가 알려주었다. 일단은 급한 불부터 끄고 나니 다시금 졸음이 찾아온다.

 

 

잠시 눈을 붙인 다음 정신을 차리고 토니가 묵고 있는 호텔을 찾아 가는 중, 노상카페에서 토니, 테리, 월터를 만났다. 어젯밤 토니가 내게 자신의 주소와 이메일, 연락처를 종이에 적어 건네주었는데 내가 떠나면서 종이를 떨어뜨린 것을 테리가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리모리예 호텔과 마략 호텔 사이의 카페에 앉아 점심도 해결할 겸 다시 내가 찾아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단다.

 

 

지갑을 소매치기 당한 어젯밤의 일을 이야기 했다. 월터가 나를 진정시키려고 지갑을 두 번 잃어버렸다는 자신의 경험담과 함께 소매치기 당하는 것은 해결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는 문제일 뿐 여행 중에서 일상다반사로 생기는 것이니 너무 걱정말라는 따듯한 조언을 해 준다. 그의 얘기를 듣고보니 그렇기도 한 듯 싶다. 지갑 속의 내용물들-현금, 신용카드 등-을 다시 채워 넣는데 시간이 걸릴 뿐, 어렵거나 불가능한 문제가 아니니 크게 염려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한다. 그나마 왼쪽 건빵 주머니에 있던 여권과 국제운전면허증, 그리고 다른 증명서류들은 고스란히 가지고 있으니 다행이라며 좋지 않은 경험은 시간이 흐르면 잊혀질 것이라면서 이들 세 사람이 연신 나의 긴장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준다.

 

 

 어제의 슬립, 그리고 지갑분실로 인해 여전히 많이 위축된 상태였다.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은데다가 혼자서 하바로브스크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쉽게 말해, 많이 겁먹었다). 토니 일행에게 하바로브스크까지 합류해도 괜찮겠냐고 물어보니 “O.K.”라고 한다.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이 앞선다. 토니와 함께 근처의 서점에서 러시아 도로지도를 구입한 다음 마략을 체크아웃 하고 곧바로 하바로브스크를 향해 출발준비를 마쳤다.

......

 

나의 평균 라이딩 속도가 100~110km인 반면, 아스팔트에서 이들의 평균 라이딩 속도는 130km를 넘겼다.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그들을 따라잡으려 힘껏 액셀을 당겼지만 그들의 바이크는 저 너머 또 다른 지평선에 세 개의 작은 점으로만 보일 뿐이다. 군데군데 비포장 도로(dirt road)가 나타났다. 어제의 기억이 떠오르자 갑자기 온몸이 뻣뻣하게 굳으면서 긴장을 한다. 첫 번째, 두 번째 비포장 도로는 간신히 넘었는데, 세 번째로 맞닥뜨린 비포장 도로는 직선구간이 아니라 커브가 계속된 구간이었다. BMW X-Challenger를 타며 로드마스터를 맡고 있는 월터와 가와사키650을 타는 전직 엔듀로 선수였던 테리는 100km에 가까운 속력으로 비포장 도로를 헤쳐나간다.

 

 

F650 Dakar를 타는 토니가 내 뒤를 따라오면서 받쳐주었지만 커브 구간의 자갈길에서 결국은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커브길 옆 1m 아래의 도랑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왼쪽 플라스틱 사이드백이 산산조각 났다. "덕분에" 안에 있던 내용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른 부분이 얼마나 고장났는지 살펴보았다. 왼쪽의 클러치 레버도 부러져 있고, 클러치 페달도 다루기 힘들게 휘어져 있었다. 클러치 레버를 수리해야 바이크를 움직일 수 있었기에 가지고 간 바이스플라이어로 클러치 레버의 끝부분을 힘껏 물게 한 후, 테리가 이뚜까 9호를 조심스럽게 도랑 밖으로 꺼냈다. 도랑 밖의 갓길에서 월터와 테리가 부서진 사이드백을 끈으로 감싸면서 내용물들이 흩어지지 않게 임시조치를 취해줬다. 토니는 가장 막내인 나의 곤두선 신경을 차분하게 해 주기 위해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 긴장을 푼 채 오프로드를 달리라고 조언해 준다. 그리고 내가 나아가야할 방향의 5~6초 앞을 바라보고 운전하라는 ‘6초의 법칙’을 꼭 염두에 둘 것을 주입시켰다.

......

 

토니, 테리, 월터의 도움으로 사투 끝에 임시조치를 취하면서 약 50km를 더 나아갔으나 어느새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월터-그는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가 휴게소 앞에서 쉬고 있는 트럭 기사에게 근처의 숙소를 물어본다. 15km 정도 더 가면 작은 마을(시비르셰보)이 있다고 알려주어 그곳으로 향하였다. 작은 모텔을 찾아 한 사람당 750RU를 지불했다. 카페를 찾아 저녁을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늦은 시간이었기에 근처의 마가진(가게)을 들러 간단한 음식과 맥주 몇 병을 산 후 저녁을 해결하였다. 자신의 40살 생일을 이렇게 소박하게 맞이한다며 월터가 연신 웃는다. 목적지인 하바로브스크까지(800km) 채 절반도 가기 전에 사고가 나서 시간지체가 되어 그들에게 많이 미안했다. 지도에는 도시로 나와 있는데 도시라기보다는 마을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더 옳을 듯한 시비르셰보의 어두운 불빛이 마치 어린 시절 외가댁에서 지내던 그 모습을 상기시켰다.

 

 

긴장감, 미안함, 안도감, 피곤함의 연속이었던 하루가 침대 속으로 녹아든다.

 

 

 

(이상준, 오토바이, 세계여행)